식당에서 상대방 접시에 고기를 넣어준 행동이 "성관계를 은연중에 동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피해 여성(23)이 "단호하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그 점을 고려하고서도 "강간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대신 "여성이 성관계에 동의한 줄 알았다"는 남성 피고인 박모씨의 주장은 종합적으로 받아들였다.
재판부의 판단은 "여성의 몇몇 행동들이 남성에게 '성관계를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 위에 서 있다.
채팅 어플로 처음 만난 두 사람⋯ "하지 말아라" 여성 거부 의사에도 성관계
가전제품 수리기사 박씨는 지난 1월 4일 채팅 어플을 통해 여성과 접촉했다. 동네 친구를 만나게 해준다는 어플이었다. 오전 11시 20분쯤, 친구 신청이 수락되자 채팅창이 열렸다. 박씨는 곧바로 여성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친구에게 자동차도 빌렸다. 그리고 실제로 만났다.
둘은 박씨가 빌린 차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이후 새벽 1시 반이 되자 고양시의 한 식당에 들어가 감자탕과 함께 소주를 마셨다. 2시간 정도 식사를 마치고, 박씨는 여성에게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운전대를 잡았다.
사건은 차량이 여성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뒤 벌어졌다. 여성의 손을 만지던 박씨가 성관계를 시도했다. 여성은 "하지 말라고 거부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음에도 멈추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씨는 조수석에 앉아있던 여성에게 성관계를 시도했다.
"폭행과 협박 없었으니 성폭행 아니다" 재판부의 기계적 판단
이 사건을 심리한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형사1부(재판장 전국진 부장판사)는 지난 12일 피고인 박씨에 대해 "강간죄는 무죄"라고 선고했다. 그러면서 술을 마시고 차를 운전한 혐의(음주운전)에 대해서만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강간 무죄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여성은 "고개를 젓고, 박씨를 밀치며 단호하게 하지 말라고 제지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밀폐된 공간에서 성인 남성인 박씨가 자신 위에 올라타 두려움을 느꼈고, 저항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박씨가 피해 여성의 의사를 무시하고 성관계를 한 것은 인정된다"면서도 "피고인이 상대방의 반항을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로 폭행⋅협박하지 않았다"고 봤다. 밀치거나, 고개를 젓는 정도는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피해자의 저항이라고 볼 수 없다는 기계적 판단이었다.
장애인권법센터의 김예원 변호사는 로톡뉴스와의 통화에서 "지난해 대법원이 성폭력 사건을 판단함에 있어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했음에도 여전히 피해자의 현저한 저항이 강간죄의 주된 판단기준이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준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NO'는 'NO'로 봤어야 하지만…성(性)인지 감수성 부족했던 재판부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피해 여성이 "하지 말라"는 말을 했음에도 '명백한 노(NO)'라고 보지 않았고, '두려움을 느꼈다'는 점도 피해자만의 생각일 수 있다고 일축했다.
오히려 고기를 덜어준 것을 "성관계를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일 수 있다"고 확대해석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씨가 '여성도 성관계를 동의했다'고 오해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적었다.
그 근거로 다음 네 가지를 제시했다.
재판부는 '① 감자탕집에서 여성이 박씨의 접시에 감자탕 고기를 넣어준 점 ② 성관계에 앞서 박씨가 '오늘 같이 있을래?'라고 물어본 점 ③ 여성의 손을 잡는 방법으로 스킨십을 먼저 시도했던 점 ④ 여성이 경찰 조사에서 성관계 정도는 아니더라도 스킨십을 할 줄은 알았다고 한 점' 등을 들어 그렇다고 설명했다.
김재련 변호사 "성적 의미 없는 무관한 행동을 근거로 삼은 잘못된 판결"
법무법인 온세상의 김재련 변호사는 "고기를 덜어준 행위에는 어떤 성적 함의도 담고 있지 않은데, 사건과 관련 없는 행위를 토대로 무죄 판결이 선고됐다"고 말했다.
이어 "재판부는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강간 혐의를) 무죄로 봤다"며 "법원이 잘못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우리 형법상 강간죄 구성요건에 폭행⋅협박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최근 수많은 판례에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 접촉' 자체가 폭행을 내포한다고 해석한다"며 "그런 판례에도 전혀 맞지 않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비판했다.